2. 생애 처음 맛본 '성악 1등'

50년대 뚝섬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전차와 버스의 좀점이어서 도시의 혜택을 다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돛단배가 떠다니고 마을 아낙들이 빨래터에 나와수다를 떠는 곳이었다.

뚝섬으로 흘러들어가기 전 우리짐은 60칸의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고 한다. 큐슈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신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쫄딱 망한 후 정학한 곳이 뚝섬이었다. 방 하나에 남자형제 여섯과 어머니, 아버지가 함께 먹고 자는 생활. 셋방살이 서러움도 많이 받았지만 뚝섬은 호연지기를 기르기엔 천혜의 장소였다.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탔고 여름이면 장마 급류를 타고 수영을 했다. 떡밥 할아버지에게 얻은 떡밥을 들고 했던 방울낚시, 형이 잡아서 구워준 참새고기 맛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아버지는 명지고 영어교사로 일하셨다. 그러나교사월급으로 여섯형제를 키우기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분이었다. 생활력강한 어머니가 팔을 걷어붙이셨다. 플라스틱 그릇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만화가게를 연 적도 있었다. 일수계까지 하는 바람에 어머니와 함께 일수를 거두러 다녔던 기억까지 있다.

나에게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었다. 중요한 시험을 바로 앞두고 꼭 아버지에게 호된 꾸지럼을 듣거나 몸이 아프곤 했다. 초등학교를 전교 2등으로 졸업한후 경기중 입학시험에 떨어진 것이 시작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1차, 2차까지 떨어져 대구까지 내려가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 명지고를 다니게 됐다.

그때 아버지는 이미 명지고 교사직을 그만두고 다시사업을 하고 계셨다. 베어링과 관련해 특허까지 보유한 제법 탄탄한 기업이었다. 집안 형편이 많이 나아져 고 2때는 연못이 있는 꽤 근사한 집까지 샀다.

학교 성적도 많이 회복되어 전교 2, 3등을 다투었다.그 때 내 꿈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성악가는 생각해본적도 없었다. 큰 목소리는 여전했는데 그 좋은 소리로 노래는 하지 않고 웅변을 했다. 한 번 단상에 오리면 학교가 쩌렁쩌렁해 상도 여러번 탔다.

군인이 되겠다는 내 꿈에 제동을 건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결사 반대하며 딴 길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그때 문득 중 2때 음악선생님에게 들었던 칭찬이 떠올랐다. 성악가. 성악가가 된다면 세계 수준이 될 자신이 있었다.

음악선생님을 찾아갔더니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그래, 왜 노래를 안하나 했다'고 하셨다. 그 길로 음악레슨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5월 1일이었다. 지금도 이도식 선생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때 선생님은 단돈 3만원의 레슨비로 매일 세시간씩, 하루도 빠지지않고 나를 가르쳤다.

선생님은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내게 실현하셨다. 하루라도 레슨에 빠지면 두들겨 맞는 강행군이었다.그리고 7개월의 레슨 후 나는 연세대 성악과에 수석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성악을 나의 길로 택한 후 비로소 나는 생애 처음으로 1등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