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탈리아서 노래 못할 것

지금도 유학생활을 돌이켜보면 끔찍하다. 쌀 살 돈이 없어서 굶었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그시절 우리 부부가 그랬다. 오시모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나는 명지대 총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와 나는 일면식도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명지고 교사였다는 것과 내가 명지고를 나왔다는 것을 소개하고 감히 장학금을 부탁했다.

기적적으로 "1년동안 매달 25만원씩 장학금을 보내주겠다."는 답신을 받게 됐다. 그 25만원은 유학생활의 젖줄이었다. 월세에 피아노임대료, 책구입비를충당하고 나면 남는 돈은 7만원 정도. 그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은행이 파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말 속이 바짝바짝 탔다. 그럴 때는 이탈리아에서 만난 친구 페르난도를 찾아갔다.오시모에서 월세방을 구해준 것이 바로 그였다.

국가경찰이던 그는 폐가 같던 우리집을 아무 대가없이 페인트칠해주기도 했다. 내가 안절부절 못하면그가 먼저 "너 돈 떨어졌니?"하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면 10만리라씩 꿔주곤 했다. 곱게만 자란 아내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쌀이 떨어졌다는 말을 하지 못해 위층에 사는 이탈리아 할머니에게 밀가루를 빌려다 수제비를 끓여주기도 했다.

나는 참 무심한 남편이었다. 속으로 '밥은 안하고 왜수제비를 끓여주나'하고 불만스러워하기만 했다. 또자고 일어나면 아내의 눈이 퉁퉁 부어있었는데 그 이유를 까맣게 몰랐다. 내가 코를 골며 잘 때 아내는 밤마다 베갯잇을 적시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참 육식을 좋아한다. 밥은 못먹어도 고기는 먹어야 했다. 궁리 끝에 아는 정육점에 가서 "오늘이 내 생일인데 친구들을 초대하려고 한다"며 외상을 부탁했다. 그 다음에는 마누라 생일, 그 다음엔 한국에서 온 손님. 끊임없이 핑계를 대가면 외상거래를 하고 조금씩 갚아나가곤 했다.

밥은 못먹어도 해야할 일이 또 있었다. 콩쿠르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오시모에 입학한 다음해인 84년 9월 나는 북부도시 만토바로 떠났다. '리골레토'로 유명한 그곳에서 콩쿠르가 열렸기 때문이다.

결혼예물시계인 오메가를 시계방에 맡기고 얻은 20만리라가 여비. 식비를 아끼려고 여행용 버너에 라면과 김치까지 싸가지고 갔다. 호텔의 청소아줌마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구박하는 바람에 창가에 서서 얼굴을 밖으로 내밀고 라면을 먹었다. 그렇게 출전한 만토바 콩쿠르에서 나는 2등을 했다. 85년 5월에는 부셰토에서 열린 베르디 콩크르에 참가했다.한국인 사상 최초로 결승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마지막 결선이 있기 전날 나는 호텔 주인과 말다툼을 벌였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내게 선불을요구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파출소에까지 끌려가서 하룻밤을 보내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본상 수상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콩쿠르가 끝난 후 결선진출자들은 이탈리아 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해야했다. 출연료도 없고 심지어 밥값까지 연주자에게 내게 했다. 상금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부당한 처사였다. 나는 주최측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공연 도중 그냥 돌아와버렸다.

집에 있는데 부셰토시 담당관에게 연락이 왔다. "앞으로 너는 이탈리아에서 노래를 못하게 될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노래 못해도 좋다. 밥까지 내돈으로 사면서 너희 나라에서 노래부르고 싶은 마음 없다"며 큰소리 쳤다.

학교 공연에서 내게 '그대의 찬손'을 부르라고 했을때도 나느 100만리라(50만원)를 달라고 했다. 학장은 나를 볼때마다 'Un millione'라고 놀렸다. 그런 일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진짜 '직업가수'로 소문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