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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네에 소문난 '고성방가 소년'



[밀양 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뽑고, 노래하다가 주머니의 행커칩을 꺼내 흔드는 테너 임웅균. [열린 음악회]를 통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의 삶은 여느 성악가와는 다르다. 고3 몇개월간의 레슨으로 연세대 성악과에 수석 입학했고 단돈 3백만원을 들고 떠난 이탈리아 유학은 차라리 고행에 가까웠다. 좌충우돌, 아직도 피가 끓는 다혈질의 [사나이]성악가. 눈물도 참 많이 흘렸다는 그의 젊은 날의 얘기를 들어본다.

말을 할때 내 목소리는 아주 굵고 크다. 학생들을 야단칠 때면 음악원 전체가 쩌렁쩌렁 울린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묻는다. "성악가는 목소리를 아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럴 때마다 나는 "강철론"을 편다. 나는 내 목이 강철처럼 단련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말할 때도 발성을 하고 코를 골면서도 내 목을 단련시킬 뿐이다. 물론 강철은 부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신 큰일에 쓰인다. 부러져 짦게 살지언정 사는 동안 강철이고 싶다. 나의 피는 항상 뜨거웠다. 내 뜨거운 피는 어린시절부터 끓고 있었다. 동네에서 임씨네 셋째아들 하면 독종으로 소문나 있었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전까지 나는 약간 주눅이 들어있는 상태였다. 방이 60칸인 집에 살다 쫄딱 망해 뚝섬으로 흘러들어간 후부터였다. 우리집은 아들만 여섯형제였다. 온 가족이 방하나를 얻어 먹고 잤으니 주인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식구였다. 그때 셋방살이의 서러움을 알았고 주인집 눈치를 봐야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런 내가 4학년 때 마을의 골목대장과 싸움을 벌였다. 몇 년을 그 놈 부하로 있었는데 어느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상대는 코피를 흘리며 울음을 떠트렸다.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어린시절 나는 음악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나마 조금 관련이 있다면 어머니가 노래를 아주 잘하였다는 정도. 결혼 후 숙대 성악과에 등록까지 했다가 덜컥 임신을 하는 바람에 뜻을 못 이루셨다. 그리고 낳은 아이가 바로 나다. 가난한 살림에 피아노를 배울 수도 없었고 음악성적도 별로였다. 목소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우렁찼는데 국민학교 5학년 때는 그 때문에 선생님에게 뺨을 맞았다. 악보에 '점점 세게'라고 적혀 있어서 그대로 불렀을 뿐이었다. 결국 음악점수는 '양'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도 큰 목소리가 문제가 되었다. 선생님은 조용하고 예쁘게 안불럿다는 이유로 59점을 줬다. 낙제점이었다. 그러니 내가 음악에 소질이 있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2학년 때 만난 이송매 선생님은 달랐다. 놀랍게도 그는 내가 '성악을 하지 않으면 안될, 기가 막히게 좋은 목소리를 지녔다'고 칭찬했다. 용기백배한 나는 '고성방가'하는 버릇이 생겼다. 당시 우리 동네 독서실의 주인 아저씨는 멋진 바리톤이었다. 매일 저녁 그는 뚝방길을 걸어다니며 '오 솔레오' 나 '키타리'를 불렀는데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나도 그 아저씨를 흉내내 온 동네를 다니며 고성방가를 시작한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네 밖에서부터 노래를 부르면 마을 사람들이 '웅균이가 오는가봐'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가고파','내 마음'이 그때 내 단골 레퍼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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