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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절망속에 굴러온 행운


2개월 동안 페루자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운 후 아내와 함께 로마로 향했다. 산타체실리아 음악원에서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처음으로 해외에서 치르는 시험이었지만 떨리거나 불안한 느낌은 없었다. 후배가 "형, 떨어지면 어떡할래?"했을 때 나는 "너 나를 뭐로 아니?" 하고 큰소리쳤다. 입학시험에 떨어질 실력이라면 처음부터 유학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라성 같은 교수들 앞에서 푸치니의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전해주오'를 불렀다. 내 노래가 끝나자 학장은 "브라비시모!"(매우 훌륭합니다.)하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2등으로 합격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3개월 후 예상했던 대로 돈이 똑 떨어졌다. 방 구하고 부엌 살림살이 몇가지 장만한 후 학비까지 내고 나니 그만이었다. 방법은 하나. 아내든 나든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고집도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아내에게 선언했다. "이탈리아에는 음악공부를 하러 온 것이므로 관광가이드 같은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겠다.""당신이 나를 먹여살리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결론적으로 같이 굶어죽자는 얘기였다.


아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지 나 몰래 크리스털 가게의 점원일을 시작했다. 더군다나 일요일에도 출근을 하느라 교회를 빠져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주일을 지키지 않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당장 가게로 달려가 주인과 대판 싸움을 벌이고 아내를 데리고 나왔다. "주일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다 먹고 살게 해주실거야" 큰소리를 쳤지만 그때 마음속으로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아무런 희망도, 대책도 없었다. 그때 후배 한명이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했다. "오시모 아카데미라는데가 있는데 학비가 전혀 없어. 오시모는 인구가 5,000명밖에 안되고 집세도 아주 싸다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내와 함께 탐색을 하러갔다. 가보니 후배의 말 그대로였다. 파바로티의 스승인 캄보갈리아니,영화 '물망초'로 유명한 페르루치오 탈리아비니 등 세계적인 대가들이 이 학교의 선생님들이었다. 거기다 집세도 정말 쌌다. 하늘이 내게 준 학교였다. 곧바로 로마의 집을 정리했다. 보증금을 빼고 자재도구를 파니 1백50만원이 수중에 남았다. 그 돈을 들고 오시모로 향했다.


이탈리아는 방 구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나라다.  신원이 확실한 사람이 아니면 쉽게 방을 내주지 않는다. 내가 가장 익숙해진 이탈리아어가 "Io sto cercando un appartamento per mensile?". 한국말로는 "월세방 있어요?"하고 다녔었다. 오시모에서는 먼저 야채가게를 찾아갔다. 외국인에게 친절한 사람이 누구냐고 주인에게 물었더니 페르난도라는 국립경찰을 소개해줬다. 파인애플 10개를 사들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오시모 유학시절 내내 절대적인 도움을 줬던 은인을 그렇게 해서 만났다. 그 사람 덕에 집을 구한 나는 입학시험 준비를 했다. 이번에도 떨어질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역시 무난하게 오시모 아카데미 오페라과에입학했다. 기라성 같은 대가들을 스승으로 모시는 행운이 내게 굴러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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