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 동네에 소문난 '고성방가 소년'
[밀양 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뽑고, 노래하다가 주머니의 행커칩을 꺼내 흔드는 테너 임웅균. [열린 음악회]를 통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의 삶은 여느 성악가와는 다르다. 고3 몇개월간의 레슨으로 연세대 성악과에 수석 입학했고 단돈...
2. 생애 처음 맛본 '성악 1등'
50년대 뚝섬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전차와 버스의 좀점이어서 도시의 혜택을 다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돛단배가 떠다니고 마을 아낙들이 빨래터에 나와수다를 떠는 곳이었다. 뚝섬으로 흘러들어가기 전 우리짐은 60칸의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고 한다....
5. 절망속에 굴러온 행운
2개월 동안 페루자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운 후 아내와 함께 로마로 향했다. 산타체실리아 음악원에서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처음으로 해외에서 치르는 시험이었지만 떨리거나 불안한 느낌은 없었다. 후배가 "형, 떨어지면 어떡할래?"했을 때 나는 "너...
6. 음악인생 뒤흔든 '30분 특강'
오시모에서 내가 살았던 집은 월세 3만원의 저택. 그러나 말이 저택이지 500년된 폐가였다. 난방시설은 고사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난로를 사고 거금 5만원을 들여 전기공사를 했다. 장롱도 없고 침대도 주워다 썼지만 없어서는 안될 것이...
7. 이탈리아서 노래 못할 것
지금도 유학생활을 돌이켜보면 끔찍하다. 쌀 살 돈이 없어서 굶었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그시절 우리 부부가 그랬다. 오시모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나는 명지대 총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와 나는 일면식도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명지고...
8. 파바로티를 이길 순 없다
마그다 올리베로로 해서 벨칸토창법을 깨우치게 된 이야기를 앞에서 했다. 그 외에도 내게는 두차례의 음악적 개안의 순간이 있었다. 콩쿠르 때문에 밀라노에 갔다가 페라로라는 원로 테너에게 잠깐동안 고음 내는 방법을 배웠다. 10년간 성악을 하면서도...
9. '거지'되어 돌아온 김포공항
졸업을 앞두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탈리아에 남을 것인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러나 이탈리아든 한국이든 돈이 있어야 노래를 할 수 있었다. 우선 일자리를 알아보기로 했다. 베네치아에서 관광가이드라도 하면서 스칼라에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10. 자랑스럽게 부른 '타향살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안풀리나" 유학을 돌아와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성악과에서는 교수가 학생을 지정해서 강사에게 배분한다. 그런데 나는 기껏해야 두명, 어떨 때는 한명만 달랑 배당받았다. 몇몇 교수에게 미운털이 박혀...
11. 30분 면담으로 얻은 교수직
점차 이름이 알려지면서 나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정도로 바쁜 성악가가 되었다. 광주에서 음악회를 끝내고 곧바로 비행기로 날아와 세종문화회관 공연에 참여하는 식이었다. 그러난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 큰 갈등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모두들...
12. 예술가의 웅변은 금
언젠가 모 신문사의 회장과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성악가들이 여러명 모인 자리였는데 거기서 나는 "한국가곡에도 발성법 연구가 필요하며 연구비 지원에 언론이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옆에 있던 거물급 음악평론가 한명이 "임선생, 자장면...
13. 베르디도 대중음악가
어쩌다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뛰쳐나갈 때가 있다. 큰소리를 치고 문을 나서지만 30분을 넘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디 갈 때가 있어야지. 언제부터인가 나는 볼일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가정적인 사람이 됐다. 공연이나 특별한 모임을...
STORY: Blog2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