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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거지'되어 돌아온 김포공항


졸업을 앞두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탈리아에 남을 것인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러나 이탈리아든 한국이든 돈이 있어야 노래를 할 수 있었다. 우선 일자리를 알아보기로 했다. 베네치아에서 관광가이드라도 하면서 스칼라에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오메가시계를 맡겨 20만리라(약 10만원)를 마련하고 베네치아로 향했다. 이른바 '물만 먹고 왔지요'사건.


지금 생각해도 우리 부부는 참 순진했다. 관광사무소에 불쑥 들어가 일자리가 있냐고 물어봤고 나중엔 안되니까 길가는 사람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아무 소득도 없이 하루가 지나고 말았다.


식사는 역앞에 앉아 바게트 빵에 김치를 넣어 우적우적 씹어먹고 생수 한 통 마시는 걸로 때웠다. 그날 샤워장도 없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밤을 지새며 부둥켜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래, 돌아가자. 더 이상은 나도 못견디겠다" 당시 아내는 오시모 아카데미 7학년생으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다. 8학년이 마지막 과정인데 그조차 중도에 포기했다. 보증금에 가재도구를 팔고 여기저기 빚을 내니 겨우 비행기표 살 돈이 남았다.


85년 11월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거지신세였다.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딱 270원. 마침 장인이친구 차를 빌려오지 않았으면 집까지 걸어가야 할 판이었다. 우선은 살집 마련하는 것이 막막했다. 그렇다고 형제나 처가의 도움을 받기는 싫었다. 결국 몇몇 친구와 장모님에게 돈을 별려 1백15만원 정도의 돈을 마련했다.


지금은 철거된 마포아파트. 연탄을 지게로 지고 날라야 하는 보증금 1백만원에 월세 15만원의 집이 우리 부부의 보금자리였다. 커튼은 신문지로 했고, 세탁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도 꼭 필요한 것이 있었다. 피아노를 할부로 마련했다. 할부금을 못내 몇 달 후 다시 빼앗기긴 했지만.


3월이 되면서 연세대 강사로 채용됐다. 강사로 일하고 받은 돈은 한달에 12만원. 월세도 안됐다. 돌파구는 단 하나. 레슨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슨도 여의치 않았다. 고최시원교수와 박종윤교수가 보내준 학생 두명의 레슨비로 생활을 겨우 해결했다.


학교 강의가 있는 날이면 아내는 호주머니에 토큰 2개를 넣어줬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 아내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달걀을 사다 50원이 부족했는데 가게 주인이 돈을 받으려고 집까지 따라왔어요. 그런데 집에 돈이 한푼도 없잖아요." 그 뒤 지금까지도 아내는 집안 여기저기에 100원짜기 동전을 쌓아놓는다. 동전을 볼 때마다 아는 아내에게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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