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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자랑스럽게 부른 '타향살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안풀리나" 유학을 돌아와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성악과에서는 교수가 학생을 지정해서 강사에게 배분한다. 그런데 나는 기껏해야 두명, 어떨 때는 한명만 달랑 배당받았다. 몇몇 교수에게 미운털이 박혀 버린 것이다. 방송이나 공연에서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콩쿠르 입상 경력도 화려하고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실력이었는데 그랬다. 86년 11월에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당시 KBS의 'FM콘서트'를 만들던 박경규 PD를 만난 자리에서였다.


나와 한참 얘기를 하던 그는 "내 생각이 맞군요. 역시 사람은 만나보고 판단해야 돼요"라고 말했다. 무슨 얘긴가 하고 물었더니 나에 대한 온갖 나쁜 소문을 죽 얘기해주었다. 알고보니 어처구니없는 오해가 있었다. 서울대 출신의 한 선배 성악가가 밀라노에 가서 오페라 카르멘을 보다가 한국 유학생을 만났다.


유학생이 너무나 버릇없게 굴어 화가 난 그는 서울에 돌아와 그 유학생을 욕하기 시작했다. "거 있잖아. 이름은 모르겠고 연대 나온 뚱뚱한 테너 말이야. 안하무인이더구먼" 그의 얘기에 사람들은 "아, 임웅균이 말이군요. 걔가 원래 그래요"하고 단정해버렸다. 사실 뚱뚱한 연대 테너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오페라 '카르멘'을 본 적도 없고 보러갈 돈도 없어쩔쩔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박경규 PD의 'FM콘서트'에 참여하게 됐다. 6인의 신인성악가가 모이는 음악회였는데 내 노래를 들은 라디오본부장이 "아니, 저렇게 좋은 테너가 있었어?"라며 앞으로 방송에 자주출연시키라고 지시를 했다.


87년부터는 'KBS콘서트홀'이라는 프로에 단골로 출연했다. '오묘한 조화','금지된 노래','황태자의 첫사랑'. 출연 때마다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방 연주회 주문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오페라 '아이다',;리골레토','포스카리가의 비극'같은 오페라에도 활발하게 참가했다. 한달이면 3분의 2는 공연 스케줄이 짜여 있을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갔다.


그러나 수많은 공연 중에서도 나를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열린 음악회'다. 93년 10월 첫 출연한 이후 '열린 음악회'는 나를 키워줬고 나는 '열린 음악회'가 성공하는데 도움을 줬다. 첫 출연에서 내가 부른 노래는 '시골아가씨', 'Love is many splendid things'. LA '열린 음악회'에서는 '두만강'과 '타향살이'를 편곡해 불렀다.


나는 이런 노래들을 '전통가요'가 아닌 '고전가요'라고 부른다. 클래식과 대중가요라는 경계를 넘어 이미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대에서 자랑스럽게 부를수 있었다. 방송출연을 많이 했지만 방송과 충돌하는 일도 많았다. 한번은 '가을맞이 가곡의 밤'에 출연해달라는 섭외가 왔는데 놀랍게도 내게 칸소네와 오페라 아리아를 불러달라고 했다. "아니, 안그래도 우리 가곡의 맥이 자꾸 끊겨 걱정인데 가곡의 밤에서까지 아리아를 부르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결국 출연을 거부해버렸다. 그 때문에 한동안 방송과 담을 쌓고 지냈지만 나는 내가 옳았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방송국의 사과를 받아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과장을 하면서 나는 111년 성악과 역사상 처음으로 가곡을 필수과목으로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했지만 나는 우리 가곡과 가요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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