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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30분 면담으로 얻은 교수직


점차 이름이 알려지면서 나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정도로 바쁜 성악가가 되었다. 광주에서 음악회를 끝내고 곧바로 비행기로 날아와 세종문화회관 공연에 참여하는 식이었다. 그러난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 큰 갈등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모두들 "한국최고의 테너"라고 추켜세웠지만 현실은 학생 1명짜리 만년 강사신세. 방송출연이 잦아질수록오히려 학교에서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한국사회에서 교수는 실력외에 뭔가가 더 필요했다.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살것인가, 아니면 외국으로 이민을 갈 것인가. 당시 미국에는 나의 팬이 꽤 많이 있었다. 93년 미국 10개 도시 순회공연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후원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93년 10월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을 굳힌 상태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운명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이강숙 총장에게 면담신청을 한 것이다.


30분 동안 독대를 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내 상황을 얘기했다. 나는 한국 최정상의 테너이며 누구 못지않은 교수로서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실력만으로 안되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만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에서 마지막으로 총장님을 만나기로 했다. 이 학교가 날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 나라를 떠나겠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대충 그런 요지였다.


그렇게 큰소리를 쳤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10년 가까이 강사생활을 하면서 나는 음악계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짐을 꾸리고 이민서류를 준비를 했다.


그런데 1월 중순 총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학기부터 나랑 같이 일합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음악계를 통틀어 30분 면담으로 교수자리를 얻어낸 최초의 인물이 됐다. 지금도 그런 결정을 한 총장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음악원에서의 내 교수법은 좀 특이하다. 제자들에게 황제처럼 명령한다. 나는 왕자병이 아니라 황제병에 걸려 있다. 내가 밥을 먹으러 일어나면 제자들이 먼저 식당으로 뛰어가 식사준비를 해놓는다. 세면실에 가도 옆에 서서 시중을 든다. 특히 학생이 거짓말을 하거나하면 당장 푸시업을 시킨다.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말리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음악은 수학, 물리와 달라서 정석이 없다. 학생이 선생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야만 가르침도 존재하는 것이다.


대신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몸을 아끼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1시간 레슨을 하게 되어 있지만 3시간씩 학생들을 붙잡아 늘어지고 졸업 후 진로를 정할 때도 발벗고 나선다. 제자들에게 나는 '밉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선생님'인 것이다. 그렇게 할때 스승의 권위가 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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